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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우리는 왜 기다리지 못하게 되었는가

김철민
김철민
- 10분 걸림

1.

저녁 7시. 배가 고프다.

냉장고를 연다. 별로 없다.

요리할 재료도 없고, 요리할 마음도 없다.

휴대폰을 든다. 앱을 연다.

메뉴를 고른다. 장바구니에 담는다. 결제한다.

"30분 후 도착 예정"

30분.

나는 생각한다. 30분도 기다려야 하나?

다른 앱을 연다. 같은 음식. "15분 배송"

취소하고 다시 주문한다.

15분이 아까운 건 아니다. 그냥 기다리기 싫다.


2.

기다림.

이 단어를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생각해본 게 언제인가?

아니, 이 질문이 더 정확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제대로 기다려본 게 언제인가?

음식 주문: 30분은 길다.

택배: 내일? 로켓배송으로 바꾼다.

영상 로딩: 3초도 참기 힘들다.

메시지 답장: 10분 안에 안 오면 불안하다.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기다리지 못한다.


3.

20년 전을 떠올려보자.

주말 저녁. 온 가족이 TV 앞에 모인다.

드라마가 시작하려면 아직 10분 남았다. 하지만 우리는 기다렸다.

채널을 돌려도 보고. 과자를 꺼내먹기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10분이 지나고, 드라마가 시작된다.

기다림은 그냥 삶의 일부였다.


4.

편지를 생각해보자.

편지를 쓴다. 우체통에 넣는다. 상대가 받기까지 며칠. 답장이 오기까지 또 며칠.

일주일, 때로는 2주.

우리는 기다렸다. 불안해하지 않았다.

기다림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기다림 자체가 관계의 일부였다.


5.

배고픔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6시. 배가 고프다.

하지만 엄마가 퇴근하려면 아직 1시간. 요리하려면 또 30분.

우리는 기다렸다. 과자 몇 개 먹으며. 숙제하며. TV 보며.

7시 반이 되면, 밥이 나온다.

기다림 끝에 오는 식사.

그게 당연했다.


6.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었다.

기다림은 예측이었다. "언제쯤 올까?"

기다림은 기대였다. "오면 좋겠다."

기다림은 상상이었다. "어떨까?"

기다림은 준비였다. "그때까지 이걸 해야지."

기다림은 감각이었다.

시간을 느끼는 감각. 관계를 이해하는 감각. 욕망을 조절하는 감각.


7.

그런데 지금은?

기다림은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다림은 실패가 되었다.

배송이 늦으면: "배송 실패"

로딩이 길면: "시스템 오류"

답장이 늦으면: "무시당한 느낌"

기다림은 더 이상 정상이 아니다.

기다림은 비정상, 비효율, 결함이 되었다.


8.

언제부터였을까?

아마존 프라임이 등장했을 때? 쿠팡 로켓배송이 시작되었을 때? 배달의민족이 30분 배송을 약속했을 때?

그때부터, 속도는 서비스의 질이 되었다.

빠른 게 좋은 것. 느린 게 나쁜 것.

그리고 우리는 학습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9.

즉시배송. 로켓배송. 새벽배송. 퀵배송.

이 모든 단어의 핵심은 '빠름'이 아니다.

핵심은, "기다림의 제거"다.

"주문 즉시 출발" "15분 내 도착" "자는 동안 배송"

기다림은 점점 짧아졌고, 결국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는 깨달았다.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가능하다.


10.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기다림이 사라지자, 더 조급해졌다.

과거: 내일 배송 → 괜찮아.

지금: 내일 배송 → 느리네. 다른 곳 찾아볼까? 오늘 배송 → 언제쯤 올까? 1시간 배송 → 아직 안 왔네. 30분 배송 →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기다림이 짧아질수록, 우리는 더 참지 못하게 되었다.


11.

왜 그럴까?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감각의 문제다.

과거에는 '30분'이 짧은 시간이었다. 지금은 '30분'이 긴 시간이다.

객관적 시간은 같다. 하지만 체감하는 시간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재설정되었다.

즉시성에 맞춰서.


12.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기다릴 이유가 사라졌다.

과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기다렸다

지금: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 기다리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기다리지 않는 데 익숙해지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참지 못한다.

엘리베이터가 안 와도, 신호등이 길어도, 계산대에 사람이 많아도,

조급해진다.


13.

즉시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나?

편리함. 시간 절약. 효율성.

맞다.

그런데 동시에 무엇을 가져갔나?

기다릴 수 있는 능력.

기다림은 단순한 수동적 시간이 아니었다.

기다림은 인내였다. 기다림은 조절이었다. 기다림은 기대였다. 기다림은 상상이었다.

즉시성은 이 모든 걸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14.

그리고 이상한 역설이 생겼다.

즉시성 사회에서,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되었다.

배달로 요리 시간 절약. 로켓배송으로 쇼핑 시간 절약. 원격으로 이동 시간 절약.

그런데,

우리는 왜 더 바쁘다고 느낄까?


15.

이유는 간단하다.

기다림이 사라지면, 시간의 빈틈이 사라진다.

과거: 주문 → (30분 기다림) → 도착

그 30분 동안 우리는 다른 걸 했다. 책을 읽거나, TV를 보거나, 멍 때리거나.

지금: 주문 → (15분) → 도착 → 다시 주문

빈틈이 없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한다.

즉시성은 시간을 절약했지만, 여유를 삭제했다.


16.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자.

우리는 왜 즉시성을 원하게 되었을까?

정말 빨라서 좋아서일까? 정말 효율적이어서일까?

아니면,

기다리는 게 불안해서일까?


17.

배가 고프다. 주문한다.

"30분 후 도착"

30분 동안 나는 무엇을 하는가?

계속 앱을 확인한다. "지금 어디쯤 왔을까?" "왜 아직도 '조리 중'이지?" "배달 시작됐나?"

30분을 기다리지 못하는 게 아니다. 30분을 불안해하는 것이다.


18.

즉시성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즉시성은 불안의 해법이다.

주문 → 즉시 확인 → 안심 배송 추적 → 실시간 위치 → 안심 곧 도착 알림 → 안심

즉시성은 우리에게, "곧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즉시성을 원한다.

빨라서가 아니라, 불안하기 싫어서.


19.

그렇다면 왜 우리는 불안한가?

왜 30분을 못 기다릴까? 왜 내일 배송이 불편할까?

이유는,

기다림의 결과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기다리면 왔다. 편지도, 물건도, 사람도.

지금은? 기다리면 올까? 안 올까? 까먹진 않았을까? 잘못 배송되진 않을까?

신뢰가 없으니, 확인하고 싶다.

그래서 추적한다. 그래서 즉시성을 원한다.

즉시성은 신뢰의 부재를 기술로 메운 결과다.


20.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빠르잖아. 편하잖아. 효율적이잖아.

맞다. 문제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이것 하나는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기다림을 잃었다.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었다.

기다림은 감각이었고, 인내였고, 조절이었고,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즉시성은 이 모든 걸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더 조급해지고 있다.


21.

내일, 무언가를 주문할 때, 한 번 멈춰서 생각해보라.

나는 정말 지금 당장 필요해서 주문하는가?

아니면,

기다리기 싫어서 주문하는 건 아닌가?

그리고 질문해보라.

나는 언제부터,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는가?

다음 주, 우리는 더 깊이 들어간다.

장바구니는 왜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감정의 저장소가 되었는가. 클릭은 왜 구매가 아니라 안심 버튼이 되었는가.


[다음 글] 6화. 장바구니는 감정의 저장소다

4화. 라스트마일, 마지막 통제권을 묻다
1.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기도 전에 알았다. 배송이다. 문을 연다. 라이더가 서 있다. ”주문하신 거요.” 나는 받는다. ”감사합니다.” 라이더는 이미 돌아선다. 다음 배송지로 향한다. 문을 닫는다. 현관 바닥에 물건을 내려놓는다. 이 과정은 30초. 나는 생각한다. 방금 이 사람은 내 집 앞까지 왔다. 정확히 내 현관문 앞까지.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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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민

『네카쿠배경제학』의 저자이자, 유통 물류 지식 채널 비욘드엑스 대표입니다. 인류의 라이프스타일이 물류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공급망의 진화 과정과 그 역할을 분석하는 데 전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국가 물류 혁신 정책 수립에 기여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