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노동의 주권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1.
오전 7시. 택배 기사가 앱을 연다.
"오늘의 배송 물량: 280개"
많다. 하지만 괜찮다. 많이 일하면 많이 번다.
트럭에 싣는다. 출발한다.
첫 번째 아파트. 40개. 두 번째 아파트. 35개. 세 번째 오피스텔. 28개.
점심을 거른다. 시간이 없다.
오후 3시. 반 정도 끝났다. 계속한다.
오후 7시. 마지막 배송을 마친다.
앱을 확인한다. "오늘의 수입: 16만 원"
집으로 돌아온다. 몸이 무겁다.
그런데 내일은?
2.
내일 앱을 열면, 뭐라고 뜰까?
"오늘의 배송 물량: 280개"일까?
아니면 "오늘의 배송 물량: 80개"일까?
아니면 "오늘 배송 물량 없음"일까?
모른다. 오늘 밤에는 알 수 없다. 내일 아침에 앱을 열어봐야 안다.
3.
이상한 일이다.
오늘 12시간을 일했다. 280개를 배송했다. 16만 원을 벌었다.
일은 많았다. 바빴다. 힘들었다.
그런데 내일은 확실하지 않다.
일이 많다고 해서, 내일도 일이 있는 건 아니다.
4.
10년 전을 떠올려본다.
택배 기사는 택배 회사의 직원이었다.
매달 정해진 급여를 받았다. 바쁜 날도, 한가한 날도, 같은 급여.
물량이 많으면 힘들었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왜? 내일도 출근하면 되니까. 다음 달도 급여가 나오니까.
일이 많으면 = 바쁘다 = 하지만 안정적이다.
5.
지금은?
일이 많다 = 바쁘다 = 하지만 불안정하다.
오늘 280개를 배송했다고 해서, 내일도 280개가 있는 건 아니다.
이번 달에 많이 벌었다고 해서, 다음 달도 많이 버는 건 아니다.
일의 양과 삶의 안정성이 분리되었다.
5.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플랫폼 노동의 구조 때문이다.
플랫폼은 '필요할 때만' 노동을 요청한다.
물량이 많을 때 → 기사를 많이 부른다.
물량이 적을 때 → 기사를 적게 부른다.
물량이 없을 때 → 기사를 부르지 않는다.
효율적이다. 플랫폼 입장에서는.
7.
하지만 기사 입장에서는?
오늘 일이 있어도, 내일 일이 있을지 모른다.
이번 주 바빴어도, 다음 주 바쁠지 모른다.
이번 달 많이 벌었어도, 다음 달 많이 벌지 모른다.
일은 있다. 하지만 '내일'은 없다.
8.
과거의 노동 방정식:
일 많음 = 바쁨 = 수입 안정 = 삶 안정
일이 많으면 바빴다. 하지만 그 바쁨이 안정을 보장했다.
"요즘 정말 바쁘네." 이 말은 불평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안도이기도 했다.
바쁘다는 건 = 일이 있다는 것 = 수입이 있다는 것 = 내일도 있다는 것.
9.
현재의 노동 방정식:
일 많음 = 바쁨 = 수입 불안정 = 삶 불안정
일이 많아도 불안하다. 오늘 바빠도 내일은 모른다.
"요즘 정말 바쁘네." 이 말은 더 이상 안도가 아니다. 그저 상태 보고일 뿐이다.
바쁘다는 건 = 오늘 일이 많다는 것 = 하지만 내일은 모른다는 것.
10.
플랫폼 노동의 특징은 '예측 불가능성'이다.
내일 일이 있을지 모른다.
얼마나 벌지 모른다.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11.
택배 기사에게 물어봤다.
"다음 주 계획이 어떻게 되세요?"
"모르죠. 물량 봐야죠."
"다음 달은요?"
"다음 달요? 더 모르죠. 성수기면 바쁘고, 비수기면 한가하고."
"그럼 언제 쉬세요?"
"물량 없을 때 쉬죠. 그게 언제인지 모르지만."
12.
계획을 세울 수 없다.
여행? 물량이 없을 때 가야 하는데, 언제 없을지 모른다.
가족 행사? 그날 물량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병원? 물량 적은 날 가야 하는데, 언제가 적을지 모른다.
삶을 설계할 수 없다.
13.
과거에는 달랐다.
월급쟁이는 휴가를 계획했다. "다음 달 둘째 주에 휴가 내고 여행 가자."
주말이 있었다. 공휴일이 있었다. 연차가 있었다.
시간이 예측 가능했다. 그래서 삶을 계획할 수 있었다.
지금은?
"다음 달에 여행 가고 싶은데, 그때 물량이 어떨지 모르겠어."
시간이 예측 불가능하다. 그래서 삶을 계획할 수 없다.
14.
더 이상한 건, 일이 많을 때조차 불안하다는 것이다.
오늘 280개. 내일 280개. 모레 280개.
3일 연속 바쁘다. 좋은 거 아닌가? 돈을 많이 버는데.
하지만 불안하다.
왜? '언제까지' 이럴지 모르니까.
15.
과거에는 바쁨이 안정의 신호였다.
"요즘 회사가 바빠. 주문이 많대."
바쁘다 = 회사가 잘된다 = 내 자리가 안정적이다.
바쁨은 안심이었다.
지금은?
"요즘 물량이 많아. 계속 콜이 온다."
많다 = 지금은 좋다 = 하지만 언제까지일까?
바쁨은 더 이상 안심이 아니다.
16.
플랫폼은 '수요'에 반응한다.
수요가 많으면 → 일감이 많다.
수요가 적으면 → 일감이 적다.
수요가 없으면 → 일감이 없다.
시장 원리다. 효율적이다.
하지만 노동자에게는?
수요 = 내 삶을 결정하는 변수. 그런데 나는 수요를 통제할 수 없다.
17.
라이더에게 물어봤다.
"언제 가장 바쁘세요?"
"점심시간이랑 저녁시간이요."
"그 시간에 안 나오면?"
"그럼 돈을 못 벌죠."
"그럼 점심이랑 저녁은 무조건 일하시는 거네요?"
"네. 그 시간을 놓치면 하루 수입이 절반이 되니까요."
자유롭게 시간을 선택한다고? 형식적으로는 그렇다. 실질적으로는 피크타임에 묶인다.
18.
일의 양이 늘어나면, 삶은 어떻게 되는가?
과거: 일이 늘어나면 → 수입이 늘어나면 → 저축한다 → 미래를 준비한다 → 삶이 안정된다.
현재: 일이 늘어나면 → 수입이 늘어나면 → 지금 쓴다 → 내일은 모르니까 → 삶이 불안정하다.
일이 많아도,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왜? 내일이 불확실하니까.
19.
노동의 주권이란 무엇인가?
내가 언제 일할지 정하는 것.
내가 얼마나 일할지 정하는 것.
내가 언제 쉴지 정하는 것.
내가 내일을 계획할 수 있는 것.
과거의 노동자는 이 주권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20.
플랫폼 노동자는?
언제 일할지 → 물량이 정한다.
얼마나 일할지 → 수요가 정한다.
언제 쉴지 → 시스템이 정한다.
내일을 계획할 수 있는가? → 없다.
주권이 없다.
21.
"그래도 선택할 수 있잖아요. 일 안 하고 싶으면 앱 안 켜면 되잖아요."
맞다.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앱을 안 켜면? 수입이 없다.
수입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다.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자유인가?
22.
더 근본적으로 보자.
왜 플랫폼 노동이 늘어나는가?
기업 입장에서는 효율적이다.
고정 인건비가 없다. 필요할 때만 쓴다. 물량에 따라 조절한다.
리스크가 없다. 노동자가 리스크를 떠안는다.
23.
산업이 성장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
배달 산업 성장 → 라이더 증가.
택배 산업 성장 → 기사 증가.
물류 산업 성장 → 노동자 증가.
일자리가 늘었다. 좋은 거 아닌가?
하지만 어떤 일자리가 늘었는가?
24.
불안정한 일자리가 늘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일자리.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일자리.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일자리.
일은 많지만, 삶은 불안정한 일자리.
25.
성장의 역설이다.
산업은 성장한다 → 플랫폼 노동이 증가한다 → 불안정 노동이 증가한다 → 삶의 불안정성이 증가한다.
성장이 안정을 가져오지 않는다. 성장이 불안정을 만든다.
26.
누가 이것을 설계했는가?
플랫폼이 의도한 것인가? 아니다.
이것은 시스템의 결과다.
효율을 추구하면 → 유연성이 필요하고 → 유연성을 위해서는 → 고정 비용을 줄여야 하고 → 고정 비용을 줄이려면 → 노동을 변동 비용으로 만들어야 한다.
플랫폼 노동은 이 논리의 귀결이다.
27.
그렇다면 노동의 주권은 어디로 갔는가?
과거: 노동자가 가지고 있었다. (일부나마)
현재: 시스템이 가지고 있다.
시스템이 수요를 계산한다. 시스템이 공급을 조절한다. 시스템이 물량을 배정한다.
노동자는 시스템이 제시하는 일감을 받을 뿐이다.
28.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일이 있잖아. 돈도 벌잖아. 자유롭잖아.
맞다. 문제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것 하나는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일이 늘어나는 것과 삶이 안정되는 것은 더 이상 같은 말이 아니다.
29.
일이 늘어날수록, 삶은 더 불안정해질 수 있다.
오늘 280개를 배송해도, 내일은 모른다.
이번 달 많이 벌어도, 다음 달은 모른다.
지금 바빠도, 나중은 모른다.
많이 일하는 것과 안정적으로 사는 것이 분리되었다.
30.
내일 아침, 택배 기사는 앱을 열 것이다.
"오늘의 배송 물량?"
280개일까? 80개일까? 0개일까?
그는 모른다. 오늘 밤에는 알 수 없다.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물건을 주문한다.
너무 자연스럽다.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가끔은 멈춰서, 질문해야 한다.
우리의 편리함이, 누군가의 불안정을 만드는 건 아닌가?
일이 늘어나면 삶은 안정되는가, 아니면 불안은 더 커지는가?
다음 글에서, 우리는 AI를 본다.
인공지능은 배송을 최적화한다. 그런데 동시에 무엇을 설계하는가. AI는 기술인가, 생활 설계자인가.
[다음 글]
9화. AI는 생활 설계권의 대행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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