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물류는 ‘물건’이 아니라 ‘시간’을 배송한다

헬스케어 패러다임의 이동과 콜드체인이 만드는 생명의 골든타임

"우리는 더 이상 약을 배송하는 게 아닙니다. 시간을 배송하고 있어요."

미국 헬스케어 물류 전문기업 머큐리(Mercury)의 한 운영 책임자가 한 말이다. 암 환자의 혈액 샘플이 채취된 후 실험실까지 도착하는 시간, 세포 치료제가 초저온을 유지하며 병원까지 이동하는 시간, 알츠하이머 진단용 뇌척수액 샘플이 상온에 노출되지 않고 분석 센터에 도착하는 시간. 이 시간들이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다. 그가 말하는 '시간'은 비유가 아니다.

헬스케어 산업의 무게중심이 치료에서 예방과 진단으로 옮겨가고 있다. 단순히 배송량이 늘어나는 차원을 넘어, 물류의 정의 자체가 바뀌고 있다.

조기 진단이 만든 새로운 영역

헬스케어를 환자의 생애주기로 나누면 예방-진단-치료-사후관리로 이어진다. 전통적으로 치료제 시장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예방과 진단 분야가 연평균 10~12%씩 성장하면서 판도가 달라지고 있다.

액체 생검(Liquid Biopsy)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암 진단에 조직 검사가 필수였지만, 이제는 혈액 속 미량의 암세포 유래 DNA 분석으로 50여 가지 암을 동시에 선별할 수 있다. 미국 이그젝트 사이언시스(Exact Sciences)가 개발한 대장암 조기 진단 키트 '콜로가드(Cologuard)'는 FDA 승인 후 1,400만 건 이상 검사가 수행됐다.

여기서 물류가 등장한다. 환자가 집에서 채취한 혈액이나 대변 샘플이 실험실까지 무사히 도착해야 진단이 가능하다. 온도 관리 실패는 샘플 손상으로, 시간 지체는 신뢰도 저하로 이어진다. 재검사는 진단 지연을 의미하고, 진단 지연은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것과 같다.

L.E.K. 컨설팅의 2025년 8월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중간 규모 병원 네트워크(3~4개 병원)에서 샘플 운송 중 발생하는 오류로 인한 연간 비용이 100만 달러(약 14억 원)에 달한다. 일반적인 혈액 샘플 재채취 비용은 건당 350달러(약 49만 원), 침습적 조직 생검은 5,000달러(약 700만 원)까지 든다.[1] 샘플 자체보다 재검사와 진단 지연으로 인한 손실이 훨씬 크다.

온도가 전부를 결정한다

헬스케어 물류 시장은 2024년 930억 달러(약 130조 원)에서 2034년 2,370억 달러(약 332조 원)로 성장할 전망이다. 연평균 성장률 9.8%.[2] 이 중 콜드체인 물류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도표 1] 헬스케어 물류 시장 성장 추이

연도 시장 규모 콜드체인 비중 성장 동력
2024년 $930억 54% 바이오의약품, 백신
2030년 $1,674억 61% 세포·유전자 치료제
2034년 $2,370억 65% 개인 맞춤형 진단

출처: Market Research Future, Grand View Research 종합

백신은 2~8℃, DNA와 RNA 샘플은 영하 80℃, 세포 치료제는 영하 196℃에서 보관·운송된다. 온도가 몇 도만 벗어나도 제품이 변질되거나 샘플이 손상된다.

미국 바이오 샘플 물류 전문기업 사이세이프(SciSafe)는 지난 15년간 1만 건 이상의 초저온 운송을 수행하며 1,400만 개 이상의 바이오 샘플을 옮겼다.[3] 이들이 사용하는 그린박스(Greenbox) 열관리 시스템은 실시간 온도 모니터링과 즉각 경보 기능을 갖췄다. 예상치 못한 지연이나 기상 악화 시 사전 마련된 비상 대응 계획이 작동한다.

크라이오포트(Cryoport)의 마크 소위키 최고상업책임자는 업계의 오래된 관행을 지적한다. "바이오마커 샘플을 드라이아이스로 운송하는 방식은 15~30%의 제품 손상률을 보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초저온 운송으로 전환하는 기업이 늘고 있습니다."[4] 드라이아이스는 운송 시간이 길어지면 승화되면서 온도를 유지하지 못한다. 액체질소 기반 극저온 용기는 며칠간 온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라스트마일이 가장 취약하다

헬스케어 물류의 진짜 도전은 라스트마일, 즉 최종 배송 단계다. 공항에서 병원까지, 실험실에서 환자 집까지. 이 마지막 구간이 가장 통제하기 어렵다.

UPS는 켄터키주 루이빌 공항 활주로 끝에 10만 제곱피트(약 9,300㎡) 규모의 헬스케어 전용 물류 시설 '랩포트(Labport)'를 운영한다. 이 시설은 새벽 1시에 샘플을 받아 같은 날 저녁 8시에 출고할 수 있다. BSL-2 등급 실험실 공간을 갖추고 있어 샘플을 안전하게 보관하면서 동시에 글로벌 항공 네트워크와 직접 연결된다.[5] 보스턴에서 채취된 혈액 샘플이 다음 비행편으로 달라스에 도착하면, 착륙하는 순간 활주로에서 직접 받아 목적지로 배송한다.

라이프 쿠리어(Life Couriers)는 미국 전역 20개 거점과 주요 공항에 허브를 두고 의료 샘플 전문 운송 서비스를 제공한다.[6] 모든 운전자는 약물 검사와 신원 조회를 통과했으며, 위험물 운송 자격증을 보유한다. 회사는 OSHA 기준을 준수하는 생물학적 위험물 노출 통제 계획을 갖췄다. 빨리 배송하는 게 아니라, 샘플의 온도와 상태를 유지하면서 안전하게 배송하는 시스템이다.

뉴비즈(nuVizz)가 개발한 실험실 샘플 배송 플랫폼은 채혈 기사의 실시간 위치 추적, 예상 도착 시간 제공, HIPAA(미국 의료정보보호법) 준수 문서화를 자동화한다. 샘플이 이동하는 모든 과정이 기록되고, 이상 징후 발생 시 즉시 대응할 수 있다. 환자는 채혈 기사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있어 불안감이 줄고, 실험실은 샘플의 이동 경로와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한다.

출처: UPS헬스케어

규제가 만든 진입장벽

헬스케어 물류는 일반 화물과 차원이 다른 규제를 받는다. 유럽의 우수 유통 기준(GDP), 미국 FDA 가이드라인, WHO 표준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온도 기록은 물론 운송 경로, 취급 인력, 포장 방식까지 검증받아야 한다.

TFI는 아부다비에서 이탈리아로 말과 낙타의 혈액 샘플을 긴급 수출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규제 준수 확인, 인증된 냉장 포장재 사용, 온도 제어 운송 조율, 세관 통관. 모든 과정을 관리하면서 샘플의 무결성을 유지하고 정시에 배송하는 것이 생명이었다.

머큐리는 생명과학 기업을 위한 맞춤형 콜드체인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국가별로 필요한 허가와 서류를 사전에 파악해 준비한다. "과거 다른 업체를 이용할 때는 배송에 며칠을 더 잡아야 했지만, 머큐리로 바꾼 후에는 연구 속도가 빨라졌다"는 과학자들의 피드백을 받는다고 한다.

한국 물류사들이 주목해야 할 지점

[도표 2] 온도별 헬스케어 제품 분류 및 물류 요구사항

온도 범위 대표 제품 운송 난이도 시장 성장률
상온 (15~25℃) 일반 의약품, 의료기기 낮음 6~8%
냉장 (2~8℃) 백신, 인슐린, 혈액제제 중간 9~11%
냉동 (-20℃) 혈액 샘플, 조직 샘플 높음 10~12%
초저온 (-80℃) DNA/RNA, 바이오마커 매우 높음 13~15%
극저온 (-196℃) 세포 치료제, 줄기세포 최고 15~18%

출처: Grand View Research, PCI Pharma Services 데이터 종합

헬스케어 물류 시장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연평균 9.4% 성장률로 2030년까지 전체 시장의 52%를 차지할 전망이다.[8] 인도의 의료기기 시장은 2030년 500억 달러(약 70조 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예상되며, 현재 70~80%를 수입에 의존한다.[9] 한국, 중국, 일본은 바이오 신약과 진단 기기 수출 증가로 국제 헬스케어 물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전통적인 제조업 물류와 달리 헬스케어 물류는 단순히 규모를 키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온도 관리 기술, 규제 준수 능력, 실시간 추적 시스템, 비상 대응 계획이 모두 갖춰져야 한다.

UPS는 2024년 9월 독일의 프리고-트랜스(Frigo-Trans)와 자매 회사 BPL을 인수하며 유럽 전역에 온도 제어 창고 네트워크와 팬유럽 콜드체인 운송 솔루션을 확보했다.[10] DHL은 같은 해 프랑스 사노피(Sanofi)와 장기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3개 주요 거점에서 창고 관리, 재고 관리, 피킹, 포장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10] 글로벌 물류사들은 M&A와 전략적 제휴를 통해 헬스케어 물류 역량을 빠르게 강화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제조 역량과 IT 인프라를 갖췄다. K-바이오가 성장하면서 세포 치료제와 바이오 의약품 수출도 늘어날 것이다. 이런 제품들을 안전하게 글로벌 시장에 배송할 물류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느냐가 문제다.

시간과 온도를 파는 비즈니스

헬스케어 물류는 더 이상 단순 운송이 아니다. 환자의 샘플을 실험실로 보내고, 진단 키트를 집까지 배송하고, 초저온 치료제를 병원까지 운반하는 모든 과정이 의료 행위의 일부가 됐다.

월드 쿠리어(World Courier)는 2018년 실험실 샘플 전문 배송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99.83%의 샘플을 사고 없이, 정시에, 지정된 온도 요구사항을 충족하며 배송했다.[7] 이들의 비결은 데이터 통합과 실시간 가시성 확보다. 샘플이 어디에 있는지, 온도는 적정한지, 예상 도착 시간은 언제인지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문제가 생기면 즉시 대응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헬스케어 물류가 일반 화물 운송과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30년 글로벌 의료비 지출이 10조 달러(약 1경 4,000조 원)를 넘어설 것으로 세계보건기구는 전망한다.[11] 이 중 상당 부분이 예방과 조기 진단으로 이동하고 있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미리 발견하고 예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 변화의 한가운데 물류가 있다. 머큐리 운영 책임자의 말처럼, 헬스케어 물류는 이제 시간을 배송한다. 정확히 말하면 환자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시간을 판다.

한국 물류 산업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려면, 단순히 빨리 많이 나르는 것을 넘어 "무엇을, 어떻게, 왜 나르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헬스케어 물류는 그 답을 찾아가는 가장 앞선 영역이다.


참고 문헌 및 출처

[1]: L.E.K. Consulting, "The True Value of Last-Mile Logistics in Healthcare" (August 2025)

[2]: Market Research Future, "Healthcare Logistics Market Analysis" (2024). 2024년 기준 시장 규모 932억 달러, 2034년까지 2,374억 달러로 성장 전망, CAGR 9.80%

[3]: SciSafe, Cold Chain Logistics and Pharmaceutical Services (2024)

[4]: BioPharma International, "Cold Chain: Going the Extra Mile" (November 2020). Mark Sawicki, Chief Commercial Officer, Cryoport

[5]: UPS Healthcare, Lab & Diagnostics Solutions (2024)

[6]: Life Couriers (formerly Associated Couriers), Medical Specimen Logistics Services (2024)

[7]: World Courier, Laboratory Logistics & Lab Courier Services (2024)

[8]: Acumen Research and Consulting, "Healthcare Logistics Market Trends, Growth & Forecast 2024-2030" (2024). 아시아태평양 지역 CAGR 9.4%, Technavio 리포트에서는 2024~2029년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전체 시장 성장의 52% 차지 전망

[9]: India Brand Equity Foundation (IBEF), cited in Research Nester "Healthcare Logistics Market Analysis" (2025)

[10]: Knowledge Sourcing Intelligence, "Healthcare Logistics Market Insights: Size, Trends, Forecast 2030" (2024). UPS 인수 2024년 9월, DHL-Sanofi 파트너십 2024년 6월

[11]: AnalystView Market Insights, "Healthcare Logistics Market Report" (November 2025). WHO 및 각국 보건부 공동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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