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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01] 나는 오늘 단 한 번도 신발을 신지 않았다 - '이동하는 인류'의 종말

김철민
김철민
- 5분 걸림

"나는 오늘 단 한 번도 신발을 신지 않았다."

저녁 무렵, 현관에 놓인 운동화를 보며 문득 깨달은 사실입니다.

어제 퇴근길에 벗어둔 각도 그대로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식탁 위에는 갓 구운 빵이, 거실에는 세탁된 셔츠가 배송되어 있습니다.

저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세상은 제 문 앞으로 쉼 없이 이동해 왔습니다.

이 현상을 단순히 '편리함'으로 치부하기엔 그 배후가 너무도 거대합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급격한 '생존 양식의 업데이트'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1. 호모 모빌리스(Homo Mobilis)의 퇴장

인류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언제나 '이동하는 존재'였습니다.

생존을 위해 사냥터를 옮겼고, 문명을 위해 시장(Market)으로 나갔습니다.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Edward Glaeser)가 그의 저서 《도시의 승리》에서 강조했듯,

도시는 인간이 서로 만나고 이동하며 발생하는 '우연한 접촉'을 통해 번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제 '외출'은 생존을 위한 필수 행위가 아니라,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만 수행하는 '선택'의 영역이 되었습니다.

이동이 기본값(Default)이었던 시대에서 배송이 기본값인 시대로, 인류의 운영체제(OS)가 교체된 것입니다.

출처: 보배드림

2. 코로나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업데이트 파일'이었다

2020년의 팬데믹을 우리는 단순히 질병의 유행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물류적 관점에서 코로나는 전 지구적 규모의 '생활 방식 강제 업데이트'였습니다.

사회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예견했던 '통제 사회'의 개념을 빌려오자면,

과거의 시스템이 인간을 특정 공간(학교, 공장)에 가두어 관리했다면,

현대의 시스템은 인간을 집 안에 머물게 하면서 '데이터의 흐름' 안에 가둡니다.

코로나는 우리가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는 대신 스마트폰 앱을 여는 법을 완전히 학습하게 만든 촉매제였습니다.

업데이트가 완료된 후, 우리는 이전의 '이동하던 삶'으로 돌아가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3. 편리함이라는 이름의 '시간 주권' 외주화

우리는 새벽 배송을 보며 "시간을 벌었다"고 좋아합니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가 《호모 데우스》에서 경고했듯,

우리가 알고리즘에 의사결정을 맡기는 순간 우리의 '자유의지'는 시스템으로 이전됩니다.

마트 진열대를 거닐며 무엇을 살지 고민하던 '우연의 시간'은 사라지고,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최적의 리스트'를 승인하는 과정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산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설계할 권리를 플랫폼에 외주(Outsourcing) 준 것입니다.

이제, 삶은 어디로 배송되는가

이 연재는 단순히 물류 산업의 발전을 찬양하는 기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시스템이 인간의 동선과 시간, 심지어 감정까지 어떻게 '라스트마일(Last-mile)'이라는 이름으로 포획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추적입니다.

물류는 더 이상 흐름이 아닙니다. 우리 삶을 규정하는 인프라이자 거대한 감옥일지도 모릅니다.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당신은 몇 번이나 신발을 신었습니까? 그 신발을 신지 않은 시간 동안, 당신의 하루는 누구에 의해 설계되었습니까?"


[다음 화 예고]

2회: 도시는 어떻게 창고가 되었나 – 당신의 1층을 점령한 물류 인터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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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민

『네카쿠배경제학』의 저자이자, 유통 물류 지식 채널 비욘드엑스 대표입니다. 인류의 라이프스타일이 물류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공급망의 진화 과정과 그 역할을 분석하는 데 전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국가 물류 혁신 정책 수립에 기여한 바 있습니다.